공약도 파기도 마음대로, 국민은 뭐지?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을 핵심으로 하는 여권 유착과 국가권력기관의 불법과 탈법적 개입, 방송 3사와 조·중·동 및 종편 등의 압도적인 지원 속에 18대 대통령에 오른 박근혜 주요 공약들이 축소되고 파기되고 있다.

표를 얻기 위해 어떤 공약인들 남발하지 못할 것이며 공약한 것들을 모두 지킬 수 없는 노릇이지만, 박 대통령이 축소하고 파기하는 공약들은 유권자의 표를 얻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것들이라 한편의 ‘대국민 사기극’을 보고 있다.

‘약속과 신뢰’. 박근혜 후보가 유독 강조했던 두 단어다. 선거운동 내내 “국민에게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그가 대통령이 되더니 전혀 다른 모습이 돼 버렸다.

“지킬 것만 공약으로 내놨다”며 내놓은 대표적인 공약은 기초연금 확대지급, 의료복지 확대, 경제민주화, 106개의 지역 사업 공약, 철도 민영화 추진 반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추진 등이었다. 각종 장밋빛 공약 속에 숨어 있던 보수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박 대통령이 축소하고 파기한 공약들은 주로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그 피해가 돌아가는 것이라 분노마저 치밀어 오른다.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 원씩 지급하겠다는 핵심 공약의 축소는 OECD 가입국 중 노인 자살률과 빈곤율이 가장 높은 현실을 내버려두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초노령연금의 100% 지급을 위해 예산을 늘려도 시원치 않을 판에 목표 수급률을 낮춤으로써 후보 시절의 공약이 거짓말이었음을 드러났다. 이분들의 표값은 박 대통령 임기 내내 제대로 지급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

국민을 농락한 공약도 있다. 4대 중증질환에 대한 약속이 그것이다. “선택진료비, 상급병실료, 간병비 등 3대 비급여를 포함해 4대 중증질환 진료비 전액을 국가에 부담하겠다”던 약속이 사실상 물 건너갔다. 정부가 발표한 4대 질환 보장강화 계획에는 3대 비급여에 대한 보장 약속이 빠져있다.

또한, 후보 시절 내놓았던 경제민주화 공약들도 최소한의 것들만 실천했을 뿐 실질적인 경제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핵심 공약들은 종족을 감춘 지 오래다. 상황이 이런데도 박 대통령은 할 만큼 했다고 한다. 신규순환출자금지, 위장계열사 일감 몰아주기와 단가 후려치기에 대한 징벌적 과세 및 총수에 대한 가중처벌 같은 경제민주화 관련 핵심 사항들은 모두 빠져있는데도 말이다.

지하경제 양성화는 오만원권의 지하 경제화와 개인 금고의 폭발적 증가로 배보다 배꼽이 큰 정책공약으로 변질했다. 탕평인사는 측근 및 관치인사로 바뀌었고 야당과의 정책협조는 국정원 국정조사와 NLL 논란으로 유명무실해졌다. 방송 공공성 회복도 MBC 노조와의 약속 파기에서 보듯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MB정부 때보다 악화한 상황이다.

이렇게 온갖 장밋빛 공약들이 축소·파기되는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 한 가지 공약만은 굳건히 지키고 있으니 그것은 증세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의 후보 시절에 내놓은 공약들을 지키려면 부자증세와 보편적 증세가 동시에 진행돼야 하는데 이것에 관해서 원칙의 박근혜로서 요지부동의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전반기 세수 부족분이 10조에 이르고, 상반기 슈퍼 추경을 통해 각종 경기부양책을 실시했음에도 경기호전의 징후가 없자, 또다시 10조를 넘나드는 하반기 추경의 필요성이 대두하고 있는 것은 한 마디로 난센스의 극치이다.

유리지갑을 털어가는 연말정산 시 각종 공제혜택의 축소와 폐지, 다시 거론되고 있는 담뱃값 인상, 금융거래 수수료율 인상, 과세 구간의 미미한 조정, 준조세 형태의 KBS 수신료 인상 같은 5%의 특권층과 상류층을 제외한 95%의 서민들 주머니를 털어가는 방식으로 세수 부족을 메우는 꼼수를 부리고 있다.

더 기막힌 것은 양도세 영구 폐지처럼 세수 부족을 초래하는 정책도 추진하려 하는 것이다. 이는 형편없이 축소된 경제민주화 관련 공약들과 함께 이 땅의 특권층과 상류층에게만 이익이 돌아가는 반서민적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중산층 70%와 일자리 70% 확대 같은 애당초 불가능했던 공약에서 한발 물러난 것은 일화에 불과하다.

박근혜 정부 출범 5개월. 복지, 안보, 경제 분야의 핵심 공약들이 줄줄이 파기되거나 크게 후퇴했다. 당선을 위해 경제민주화와 복지확대 등으로 보수 본색을 가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은 150일. 믿어 달라며 목청 높여 약속했다가 파기할 때는 아주 은밀하고 조용하게 해 치운다.

공약은 국민과의 약속이고, 공약 파기는 국민을 속이는 행위다. 파기가 불가피할 경우 국민에게 최소한의 해명과 사과가 있어야 한다. 공약도 마음대로, 파기도 제 뜻대로 하겠다는 건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