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NL의 굴레에서 벗어나자

1> 주지하듯이 80년대 학생운동의 다수파는 NL이었다. 심지어는 나도 NL이었듯이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이 ‘NL의 물’을 마시고 컸다. 보통 그 시절을 NL과 PD의 대립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NL독주 체제'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통계를 제시할 수는 없겠지만) NL은 그냥 다수파가 아니라 절대 다수파였고, PD는 짜장면 위의 강낭콩 같은 일종의 데코레이션에 불과했다. 운동권 정파 분류를 하려면 NL-PD의 구분 보다는 주사NL과 비주사NL의 구분을 살펴보는 것이 오히려 더 의미 있을 것이다.

NL 독주체제의 후과는 컸다. 민주화운동이 끝난지 2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한국의 민주화세대는 NL식 사고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가치관은 대개 스무 살 때의 정신상태에서 정지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평상시에는 NL을 잊고 살지만, 술먹고 노래방에 가거나 주요한 정치 이슈가 발생하면 갑자기 잠재되어있던 ‘NL본능’이 폭발한다.

너무나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 NL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2> 통합진보당은 집권여당의 입장에서 볼 때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통진당은 지난 대선 때, 보수층을 자극해 50대의 혁명적 투표참여와 보수진영의 총결집을 이뤄냈고 결국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을 이뤄냈다.

대선 이후에도 여당은 중요한 국면마다 통진당 이슈를 활용해 위기를 효과적으로 돌파해 나갔다. 만약 통합진보당 이슈가 없었다면, 여당이나 국가정보원은 지금쯤 만신창이가 되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여당 지지율은 제1야당의 두 배 수준이다.

이 모든 것은 집권세력이 유효 적절히 통진당을 갖고 놀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통진당의 헌법재판소 제소 역시 내년 지방선거를 위한 여당의 필승전략이다. 지방선거는 대개 집권당에 대한 중간 평가로 치러지기 때문에 여당에 불리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통진당 해산이 전국적인 이슈로 떠오르면서 여당의 지방선거 전망이 밝아지고 있다.

만약 내년 선거를 앞두고 (헌재 판결시한은 6개월이다) 헌재에서 통진당 해산이 무산되면 통진당은 쾌재를 부르며 기를 쓰고 출마할 것이기에 야당표는 5% 이상 분열되는 효과가 발생하는 반면, 여당표는 그 반대의 효과가 발생할 것이다. 통진당 해산 불발에 대한 대중적 아쉬움을 남기며 보수층 결집효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3> 새누리당의 입장에서 볼 때 통진당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 역할을 계속해주고 있지만, 이를 바라보는 옛 NL세대의 관점은 80년대의 관점에서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공안탄압에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순수하게 논리적으로만 생각해보면 ‘공안탄압’이라는 80년대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적으로 생각해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역사가 발전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이 바뀐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려면 사회적 아젠다 설정과 이에 따른 사회적 논쟁이 진행되어야 한다.

나는 ‘복지-증세논쟁’을 중심으로 사회적 의제를 끌고 가는 것이 매우 중요한 사회진보전략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되도록 빨리 NL논쟁을 마감하고 다음 논쟁인 복지-증세 논쟁으로 전환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NL이슈가 살아있는 한 이 전략은 꾸준히 방해 받을 것이다.

오늘의 형국은 복지논쟁 뿐 아니라 모든 사회진보전략들이 NL논쟁에 갇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말 무서운 것은 통진당 이슈가 우리의 평생을 따라다니는 것이다. 통진당이 사라지지 않는 한 NL 이슈는 우리가 죽을 때 까지 계속 반복-재생산 될 이슈다. 이 점이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4> 386세대니, 486세대니 하는 말들이 있지만, 내가 보기엔 맞지 않다. 우리는 그냥 NL세대 일 뿐이다. 386세대니 486세대니 하는 말들은 NL세대의 위장 명칭에 불과하다.

NL의 물을 먹고 자라서 아직도 NL의 논리에 갇혀 있는 NL세대 들에게 호소하고 싶다.

이제 NL의 시대를 마감하자.

그것이 실질적인 의미에서 역사의 진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