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노동절과 근로자의 날’

편집국l승인2020.05.06l수정2020.05.06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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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삶은 은유

지난 5월 1일은 제 130회 노동절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법적으로는 ‘근로자의 날’로 정해져 있고, 일부 매체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언론매체에서도 ‘근로자의 날’로 명명하고 있다. 그러나 집권세력인 정부의 이념에 따라 ‘노동절’ 또는 ‘근로자의 날’로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이는 언어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에 은유와 연관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은유는 수사적 필요성에 의해 단순히 언어만의 특성, 사고와 행위보다는 말의 특성으로 생각되어 왔으나, 레이코프는 우리가 사고하고 행동하는 관점이 되는 일상적 개념체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은유적이라 제안한다.

은유는 한 개념영역을 다른 개념영역으로 인지하는 사고체계이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생활의 경험 속에 상존해 있으며, 인간의 언어와 사고 작용의 근본이 된다(Lakoff & Johnson, 2006). 은유 표현은 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화자들의 인식과 사고 작용을 반영하기 때문에 은유 표현을 연구하면 그 언어가 사용된 사회의 문화와 언중들의 의식 구조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변정민, 2002). 실제로 은유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채 일상생활 전반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삶 자체가 은유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인간에게 노동은 삶을 구성하고 있는 근본적인 전제이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분야에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은유가 빈번히 사용되고 있으며, 실제 삶의 현장에서 노동은유의 사용은 메시지를 의도하는 바대로 실현시키는 수단이 된다.

노동절을 국제적으로 ‘May Day’라고 하는데 여기에서는 ‘메이데이’라는 어휘가 두 가지 표기법(May Day와 Mayday)으로 사용된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 하나의 표현인 May Day의 의미 속에 들어 있는 은유를 노동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또 다른 표현인 Mayday와의 관계적 은유가 있다.

△ 자본의 열망, 빈 손으로 추락하는 노동

자본주의(capitalism)는 재화의 사적 소유권을 사회 구성원의 양도 불가능한 기본권으로 인정하는 사회 구성체이다. 또는 생산 수단을 가진 자본가 및 기업가 계급이 그 이익 추구를 위해 생산 활동을 하도록 보장하는 사회 경제 체제로 정의하기도 한다. 재화의 사적 소유권에 대한 인정은 곧바로 재화의 매매, 양도, 소비 및 이윤의 처분 등에 대한 결정을 개인에게 일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사적 소유권을 기반으로 한 경제 체제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경제 체계에서는 상품 또는 용역의 가격, 투자, 분배 등이 주로 시장 경제를 통해 이루어진다.

고대에 이미 일부 자본주의적 특징을 보이는 조직이 존재하였으며 중세 말에는 상업 자본이 발달하기도 하였으나, 현대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제도들은 대부분 16세기에서부터 19세기까지 영국에서 발달한 것들이다. 서양에서는 봉건 제도의 종식과 함께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사회 구성체로 자리 잡았다.

20세기에 이르러 서구 중심으로 산업화가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자본가 계급은 극심한 노동력 착취로 인해 부를 축적하고 국가 권력과 결탁해 자본주의(시장경제) 제도를 견고히 구축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착취의 고리를 끊어내고 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얻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단결이 필수적으로 요구됐다.

이를 위해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밝힘과 동시에 실천적 행위를 강조하며 마르크스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구호로 세계 노동자들에게 호소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동’의 의미가 부각되어 노동자, 노동권 등 그 개념적 은유를 확장해 오고 있다.

애덤스미스는 그의 저서 국부론을 통해 중상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유방임 체계"를 옹호하였다. 이로 인해 스미스는 고전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절대 우위의 개념을 들어 무역의 이점을 설명하고 시장 자동 조절장치를 고안한 스미스는 오늘날에도 자주 인용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로 시장의 기능을 설명하였는데 이 때 ”보이지 않는 손“은 은유적 표현이다.

피 정의항은 생략되어 있고 그 의미는 ‘시장’, “가격‘이며 이를 확장된 은유로 표현하면 ’자본‘이다, 정의항인 “보이지 않는 손”은 ’조정자‘ 또는 ’조정 능력자‘의 은유적 표현이다. 이러한 ’조정 능력자‘는 신(神)적 은유를 갖게 되는데 후에 시카고학파의 신자유주의자들과 자본가들의 절대자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파생된 물질 만능시대를 표상하는 은유가 ’돈은 신‘ 은유이다.

한편, 리카르도는 1817년 《정치경제학 및 세무 개론》을 출간하여 비교 우위의 개념을 통해 타국과의 거래를 함에 있어 우위적인 무역 개념을 설명한 것은 지향적 은유에 해당하는 「이익은 위」 은유를 사용하였다. 또한 비옥도에 따라 차등 부과되는 지대이론인 ‘차액지대설’의 개념을 들어 절대지대에 시달리는 비합리적 가격 결정구조에 시달리는 임차인에게 유리한 진일보한 이론을 제창해 방향성을 나타내는 「앞은 좋음」은유로 읽힌다. 리카르도 역시 자유무역을 지지하였다.

고전경제학은 자유주의적 신념에 따라 정부의 시장 관여를 최소한으로 제한하는 자유방임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정부의 역할을 야간 방범 정도로 제한하는 이른바 ‘야경국가'로 제한하였다. 이것은 국가는 사람처럼 의사를 가지고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은유가 깔려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에 따른 폐해가 심각해지자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이후 수정자본주의 학파인 케인즈학파가 등장해 마르크스 이론을 일부 받아들인 공적부조와 정부의 시장개입을 통해 대공황을 타개하였다. 이 역시 국가가 의사능력과 행위능력을 가지고 있는 「국가는 사람」 은유에 해당되는 개념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자본주의는 세계 각지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수정되고 변형되어 왔으며, 사회주의와 혼합 경제를 이루기도 하였다. 20세기에 들어 자본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공산주의 국가 경제 체제와 대립했다.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사회화 과정은 이데올로기적 지배를 위한 갈등과 투쟁의 과정이다.

프랑스 맑스주의 철학자인 알튀세르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맑스의 이데올로기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계급 및 이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가가 학교, 교회, 언론, 대중매체 등 핵심적인 이데올로기 생산수단, 즉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을 소유하고 장악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지배계급과 국가는 이러한 기구들을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유포함으로써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기존의 사회적 관계를 안정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자본가가 소유하고 있는 언론들은 자본가 계급에게 유리한 관념들을 유포함으로써 이데올로기적 지배를 하는 있는 셈이다. 피지배계급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의식과 관념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지배에 의해서이다. 결국 이데올로기적 지배의 핵심은 이데올로기의 생산 및 유포 수단을 누가 지배하는가 하는 점인데,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지배는 경제적·정치적 지배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여기서 이데올로기적 이념은 「논쟁은 전쟁」 은유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는 기본적으로 정과 반의 대립개념으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로가 은폐하고 있는 노동 프레임

Lakoff의 은유 이론은 개념적 은유와 언어적 은유를 엄격히 구별한다. 개념적 은유는 사고하는 방식인 반면 은유 표현은 말의 특성(말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논쟁은 전쟁이다]라는 개념적 은유는 언어적으로 구체화된 모델 ‘공격, 방어, 분쇄, 격파, 이기다’ 등과 같이 다양한 표현으로 나타난다. 즉, 개념적 은유는 모든 언어적 은유의 기초가 되는 [A IS B] 형태의 상위 은유이고, 언어적 은유는 개념적 은유를 통한 낱말의 실현 및 구체적 언어 표현인 것이다.

어떤 개념의 한 측면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도록(가령, 싸움의 관점에서 논쟁의 측면을 이해하도록)해 주는 체계성은 필연적으로 그 개념의 다른 측면들을 은폐할 것이다. 은유적 개념은 우리에게 어떤 개념의 한 측면(예 : 논쟁의 전투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도록 함으로써 그 은유와 일치하지 않는 그 개념의 다른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방해한다. 예를 들어 열띤 논쟁 중에 우리가 적의 입장을 공격하고, 우리 자신의 입장을 방어하려고 할 때, 우리는 논쟁의 협동적 측면을 놓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60년대 초반까지는 ‘근로’라는 말 대신 ‘노동’이라는 낱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노동이 근로라는 단어로 대체된 것은 부각과 은폐를 활용한 도관은유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화자는 아이디어(물건)를 낱말(그릇) 속에 넣고 이 물건을 청자에게(어떤 도관을 따라) 보내고, 그 청자는 그 낱말/그릇으로부터 아이디어/물건을 꺼낸다. 예를들면 “그 의미는 그 낱말들 속에 있다‘의 의미에는 맥락이 문제되지 않는 도관은유에 해당하지만, ”오렌지 주스는 자리에 앉으시오“라는 문장은 따로 떼어 놓으면 전혀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이 문장은 발화하는 의미의 맥락 속으로 들어가면 의미를 갖는다. 어느 카페에 날마다 손님이 두 사람이 온다고 하자, 한사람은 늘 커피를 마시고 다른 한사람은 오렌지 주스를 마신다면 다음날 다시 두 사람이 카페에 갔다면 오렌지 주스가 없는 날에도 어느 자리가 오렌지 주스 자리인지 분명해 진다.(레이코프 앤 존슨, ’삶으로서의 은유‘에서 인용)

이러한 실례가 보여주듯 은유적 개념이 우리에게 의사소통과 논쟁, 시간에 대한 부분적 이해를 제공하며, 또한 그렇게 함으로서 이러한 개념의 다른 측면을 은폐한다는 점이다.

노동절의 유래는 1880년대 미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1884년 미국 방직노동자들을 중심으로 '8시간 노동제' 실현을 주장하며 총파업을 결의했다. 제1차 시위의 날로 정한 1886년 5월1일, 미국 시카고에서는 21만 노동자가 경찰과 대항하며 유혈(流血)사태가 벌어졌다. 1889년 7월 세계 각국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모인 제2인터내셔널 파리총회에서 이날을 기념하고 메이데이로 선포했다. 이듬해 1890년 5월1일 미국에서 첫 메이데이 대회가 개최됐고 이후 전 세계 여러 나라도 이를 기념해오고 있다. 죽음의 댓가로 얻어 낸 노동운동의 하나의 선언을 보자.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가라! 가난과 불행과 힘겨운 노동으로 짓밟히고 있는 수백만 노동자의 운동을 없애겠단 말인가! 그렇다. 당신은 하나의 불꽃을 짓밟아 버릴 수 있다. 그러나 당신 앞에서, 뒤에서, 사면팔방에서 끊일 줄 모르는 불꽃은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들불이다. 당신이라도 이 들불을 끌 수 없으리라. (교수형 당한 미국 노동운동 지도자 스파이즈의 법정 최후진술 중에서 부분 인용)

여기에서 ‘8시간 노동제’는 「노동은 시간」이라는 공간은유에 해당되는 개념이 사용되고 있다. 이 것으로 도출되는 또 하나의 은유가 「시간은 돈」 은유가 연결된다. 또한 ‘끊일 줄 모르는 불꽃’은 「불꽃은 위」를 향한 지향적 은유를 표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였던 지난 1923년 5월1일 조선노동총연맹 소속 노동자 2000여명이 모여 '노동시간단축·임금인상·실업방지'를 주장한 것이 최초 행사다. 해방 이후 정부는 1958년부터 대한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의 전신) 창립일인 3월10일을 '노동절'로 정해 행사를 치러왔다. 이후 1963년 노동법 개정 과정에서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근로자의 날 법)'을 처음 제정하고 매년 3월10일을 유급휴일 법정기념일로 정했다. 명칭은 노동절에서 '근로자의 날'로 변경됐다.

 이에 노동단체들은 "노동절의 의미가 왜곡되고 이름마저 바뀌었다"고 반발하며 '5월1일 노동절'을 되찾고자 하는 운동을 이어왔다. 김영삼 정권 들어 기념일은 지난 1994년부터 3월10일에서 다시 5월1일로 옮겨졌지만 명칭은 바뀌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 '근로자의 날'로 유지되고 있다.

여기서 ‘노동’이라는 단어가 ‘근로’로 바뀐 배경에는 부각과 은폐라는 도식이 도사리고 있다. 다음의 경구는 노동을 근로로 바꾸는데 프레임을 변경해 이익을 얻고자 하는 세력들이 그 변경의 토대를 제공해 주는 문장의 하나로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이다.

노는 사람들 속에서 혼자 부지런히 일하고, 자는 사람들 속에서 혼자 자지 않고 일해라(법구경)

손을 게을리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자는 부하게 된다.(성경)

이와 같은 문장을 선택하는 경우에도 교묘한 전략이 은폐되어 있다. 그 것은 「좋음의 위, 나쁨은 아래」 은유를 이용 한다. 지금까지 프레임화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 것의 왜곡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 것을 이용한다. 주로 종교적 잠언, 교훈적 관용어구, 속담 등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알고 있는 어구를 이용한다.

‘노동’이라는 낱말 속에는 ⓵육체적 고통, 또는 그에 따른 고단함의 의미, ⓶생활수단인 ‘돈’을 얻기 위한 방편, ⓷자본과는 대립적 관계, 즉 피 고용인적 지위, 그에 따른 ⓸‘정당한 노동의 댓가’라는 은유가 함의되어 있고 그 노동의 정당한 댓가는 ⓹‘단결과 투쟁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은유가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자본가는 그러한 함의가 없는 단어를 찾아 프레임화 하면 훨씬 노동자들을 통제하기가 쉬워 진다.

위의 인용문을 이용해 그 프레임으로 선택된 단어가 ‘근로’이다. 이러한 논리 개념이 부각과 은폐를 통한 사고의 프레임화이며 푸코가 말하고 있는 지식과 권력의 부조리한 관계를 이용한 자본가들의 속내이며, ’근로‘라는 말 속에 은폐하고 있는 노동인 것이다. 이러한 프레임을 은유로 사용하는 집단은 신자유주의(시장경제) 경제체제를 지향하는 보수주의 집단이다. 이들은 정치, 교육, 금융, 언론 등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널리 포진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보수언론은 프레임화의 가장 중요한 활용매체이다.

위에서 언급 한 것처럼 우리나라의 노동절이 근로자의 날로 바뀌는 데에는 보수적인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결탁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5·16 군사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부는 국민을 ‘가난으로부터 구제’라는 프레임을 걸어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자본가를 육성하는데 필요한 재원을 노동력 착취로 인한 노동자들에게서 찾았다. 노동이라는 말은 속성상 위의 ⓵∼⓹의 의미를 개념 속에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이라는 말은 은폐하고, 「좋음은 위」 은유 개념인 ‘근로’라는 언어를 부각시켜 감시와 통제를 통한 모든 정책적 수단을 앞세워 자본가를 육성하였다.

그 와중에 노동을 부각시키려는 움직임은 국가폭력을 동원해 은폐시켰다. 이러한 ‘근로’와 ‘노동’이라는 말을 부각과 은폐의 은유로 이용하는데 앞장선 집단이 정치권력, 자본권력과 손잡은 보수적 언론사들이다. 이들은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자처하고 나서서 권력을 키워나가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오늘날에도 진보적 언론매체에서는 5월 1일을 ‘노동절’이라 표기하지만 보수 언론매체에서는 ‘근로자의 날’로 매체에 표기한다. 표면상으로는 노동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사회로 보이지만 자본의 속성은 좀 더 교묘해 지고 보수적 언론도 그 폭력을 은폐시킨다. 따라서 ‘근로’라는 말 속에는 자본의 끝없는 욕망, 감시와 통제, 노동력 착취, 국가폭력이 정당화되고 은폐되어 있다.

△ May-day와 Mayday

한편 노동자의 날을 뜻하는 영문식 표현 메이데이는 'May day'라고 두 단어 사이를 띄어쓰거나 'May-day'라고 해야 한다. 만약 'Mayday'라고 붙여쓰게 되면 선박·공기·우주 비행체에 대한 국제 무선 전화의 조난 신호(전신상 SOS)를 뜻하는 것이 된다. 항공 통행량이 프랑스 파리에 몰려 프랑스어가 국제어로 통용되던 당시, "나를 도우러 와 달라"를 뜻하는 프랑스어 "Venez m'aider(브네 메데)"에서 따온 'm'aider'가 이후 영어의 비슷한 발음으로 옮기면서 'Mayday(메이데이)'가 된 것이 그 유래다.

케임브리지대학은 한 집단은 방귀 냄새가 나는 지저분한 공간에, 다른 집단은 잘 정돈된 공간에 있게 한 뒤 도덕적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정돈된 공간에 있던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 대해 더 관대했다. 은유는 언어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우리 사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상에서 은유를 사용할 때, 혹은 은유를 받아들일 때 신중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잘못된 은유가 현실을 왜곡하거나 우리 사고를 기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티브 라테는 “은유는 일상의 언어나 생각, 당신이 들고 있는 커피 한 잔에도 숨어 있다”며 “우리의 뇌는 매순간 이 은유를 사용해 사고하고 있다”고 말한다.

'May day'는 단순히 노동자들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든 의미가 아님은 위에서 살펴본 대로이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를 거쳐 21세기까지 오는 동안 노동자들의 국제적인 연대는 사회주의 진영의 정책수정으로 인해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도입되면서 약화되기 시작하고 국제적인 노동자기구로 ILO가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부당한 대우에 대한 실제적인 강제 구제 수단이 없는 상태여서 각 정부가 이를 해결해야 하는데 정부는 보수냐 진보냐에 따라 정책기조가 다르기 때문에 불안정적이고 노조도 조직개별주의가 심화됨으로서 노동소외가 일어나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그 형태와 규모면에서 초기 자본주의 사회와는 차원이 다르게 변화해 왔다. 세계적 경제 개방으로 인해 자본은 국가를 넘나들며 그 신체를 불리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는 탄력적인 몸매로 변해가고 있다. 그 황홀하리만치 현란한 몸짓으로 부를 빨아들이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은 현대 자본사회의 징후를 금융자본을 이용한 부의 축적으로 보고 그 금융의 속성은 돈이며, 돈은 끝없이 자기증식을 하는 속성으로 인해 결국은 모든 것을 파괴시키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고 현대자본주의 사회를 진단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파국으로 치 닫는 것은 시간의 문제인가. 그 파국의 끝에 초래할 일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노동소외로 인해 발생하는 예측 불가능한 사태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발물로 은유한다면, 진정한 노동의 의미가 은유되어 있는 'May-day'는 지금, 구조의 신호를 보내고 있는 'Mayday'의 기표를 함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이제는 쏘아 올려야 한다. 구조신호를

21세기 프레카리아트는 잠재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은유이다. “지난 30년간 노동시장의 급속한 유연화가 새로운 위험계급인 ‘프레카리아트’(Precariat)층을 만들어내고 있다”며 “청년실업률과 비정규직 비율이 높은 한국에서도 프레카리아트가 크게 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영국의 가이 스탠딩(Guy Standing) 교수는 말한다.

지난 30년간의 거대한 변환 과정에서 소득 불평등이 확대되고 ‘고용 없는 성장’이 나타났다. 미국의 경우에는 경제위기 이후 오히려 ‘일자리를 줄이는 경기회복(Jobloss Recovery)’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것이 위기를 불러온 근저에 깔려 있던 문제들이다. 그는 이어서 “신자유주의적 세계 시장이라는 사이렌은 사람들을 ‘불안정’이라는 바위 위로 유혹했다. 이런 지구적 변환은 공동체와 사회적 연대라는 강력한 관념을 제거했고, 자유와 평등도 침식시켰다. 지구화는 경제적 불안을 초래하고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켰다.”며 이대로 대책이 없이 지속되는 현상을 보이면 슬라보에 지젝이 지적한 것처럼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런 예측을 내놓고 있다.

1929년 대공황 때도 경험했던 위기인데 모든 선진국에서 거대한 규모로 불평등이 증가하고 있다. 더군다나 세계경제가 각국의 보호무역주의로 인해 경기침체기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지금, 그러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불평등을 문제 삼지 않는다. 경제성장의 과실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경제 전체에 퍼지는 ‘트리클다운(Trickle Down) 효과’를 신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리클다운은 더 이상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불평등은 사회를 좀먹고 패자를 불만과 좌절, 상대적 박탈감에 빠뜨린다.(한겨례 신문, 2010년 9월1일자 사회면) 역사적으로 보면 혁명은 공평한 가난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불공평한 가난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국제적이고 기존관습에 젖어 있지 않은 새롭고 집중적인 협의기구를 만들어서 잠재적 위험세력에게 'Mayday'의 신호를 쏘아야 한다.

                                                   -정찬곤 광주전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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