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와 도시이주에 따른 인구 감소, 저출산, 시장 개방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 농촌에 정착하는 이주여성들은 새로운 희망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직 우리사회에서 이주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 무관심이 여전해 이들의 정착을 어렵게 하고 있고, 일부는 사건ㆍ사고의 희생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시민단체들이 이주여성들의 조기 정착을 위한 각종 방안을 내놓고 있고 이민자들의 숫자가 점차 늘어나면서 성공적인 정착 단계를 지나 농촌사회를 주도하는 여성도 나타나고 있다.
◇"나도 한국인"..사회적 기업 이끌고 상담사 역할도
"베트남이 아닌 한국에서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2004년 3월 결혼중개업소를 통해 남편(41.어업)을 소개받고 한국에 정착한 베트남 출신 김정아(28.여.전남 영광군 염산면)씨는 이제 한국에서의 행복한 삶을 꿈꾸고 있다.
김씨는 지난해 7월 '진정한 한국인'으로 살기 위해 개명했다.
세 남매를 키우고 있는 김씨는 지난해 4월부터 영광군 군서면의 사회적 기업 '산머루 마을'에서 이주여성 18명과 영광의 특산품인 모싯잎 송편을 만들고 굴비를 보관할 수 있는 아이스 팩을 생산하며 당당한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김씨의 한국 생활이 처음부터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 가면 나도 잘살 수 있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얼굴도 모르는 한국 남자와 결혼했지만 처음에는 말도 통하지 않았고 문화적 차이도 커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남편과 이웃의 따뜻한 배려와 산머루 마을에서 같은 처지의 이주여성들과 어울리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
김씨는 "처음에는 한국말도 모르고 문화도 전혀 달라 많이 힘들었는데 이제는 아이들도 잘 자라고 있고, 좋은 분들의 도움으로 많이 적응했다"며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좋은 집을 짓고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웃어 보였다.
충북 괴산군 괴산읍 서부리에 거주하는 필리핀 출신 아바바오 마리아페(41)씨는 2008년부터 괴산군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아동양육 방문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한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군내 이주여성가정 4곳을 찾아 '아이를 똑똑하고 건강하게 키우는 법' 등을 가르치고 있다.
1995년 8월 교회를 통해 생면부지의 남편 김근회(50)씨와 결혼한 그는 유창한 한국어 실력 덕분에 2006년부터 현재까지 괴산 청소년수련원과 도서관에서 영어 강사로 활동하고 있고 최근에는 어린이집 2곳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처음 입국할 당시 '가나다라'밖에 몰랐던 그가 이처럼 왕성한 활동을 벌이게 된 것은 남편과 가족의 배려, 타고난 부지런함 때문이다.
그는 매일 단어 10여개를 외우고 생소한 물건을 발견하면 사용법이나 용도가 무엇인지 등을 꼬치꼬치 캐묻는 '똑순이'다.
독학으로 운전면허까지 딴 그는 집안 대·소사도 도맡다싶이하는 살림꾼이다.
◇이주여성이 마을 이장으로
"마을 주민들을 내 가족이라 생각하고 심부름꾼의 역할을 열심히 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어렵네요."
2008년 경남지역 이주여성 가운데 처음으로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 금천마을의 이장이 됐던 박복순(51.여)씨는 지난 3년간을 되돌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출신인 박씨는 1998년 먼저 이주한 친구의 소개로 만난 남편 이회근(55)씨와 결혼, 현재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는 아들을 두고 있다.
농사를 짓는 남편과 함께 지난 10여년 동안 마을 내 궂은 일을 도맡아 주민들로부터 큰 신뢰를 받아 온 박씨는 주민들의 요청으로 이장직을 맡았고 올해로 3년차가 됐다.
처음엔 마을의 대·소사를 빠짐없이 챙기고 지자체의 각종 시책을 마을주민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박씨는 "이제는 마을주민들의 든든한 지원에 힘입어 바쁜 줄 모르고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마을의 숙원사업인 수로 정비 사업을 이장직을 마칠 때까지 꼭 추진하고 싶다"고 야무진 포부를 밝혔다.
필리핀 출신 이주여성 트엥트이(40.가명)씨는 2001년 2월 경기 평택시 서탄면에 거주하는 한국인 남성(40.농업)과 결혼해 아들 2명을 낳았다.
시어머니를 모시며 하우스 시설 재배를 하는 농부의 아내로 살아온 지 올해 꼭 10년째로 이제는 시골 아낙네가 다 됐다.
그는 농촌에 살면서 아이를 키우다 보니 교육에 대한 관심이 커 컴퓨터를 직접 배우기 위해 학교의 방과 후 프로그램까지 활용하는 열성 학부모다.
그는 그렇게 배운 컴퓨터를 통해 필리핀의 가족들과 수시로 화상채팅을 하며 타향살이의 외로움마저 잊고 있다.
평택다문화가정지원센터 관계자는 "트엥트이씨는 새벽 5시부터 남편과 함께 농사일을 하며 열심히 살고 있고 마을 어른들이나 이웃들에게도 정성을 다해 평이 좋다"고 말했다.
◇농촌과 이주여성 상생의 길
결혼이민여성과 그 자녀들이 계속 증가하면서 어느덧 농촌사회의 핵심 역군으로 성장하고 있다.
급격한 이농과 고령화 등으로 해체 위기에 몰렸던 농촌에 생기를 불어넣고 적막했던 농촌공동체에서 갓난 아기 울음소리가 울리도록 했다.
10년 뒤면 농촌지역 결혼이민자 숫자는 지금의 배로 늘고, 농촌지역 초ㆍ중ㆍ고생의 절반을 다문화가정 자녀들이 차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행정안전부 등이 지난해 5월 조사한 결과 국내 결혼이민자는 모두 16만7천90명으로 이 가운데 여자는 14만9천852명이다.
이 가운데 우리 국적을 취득한 사람은 25%가량 되며 출신을 보면 중국 조선족이 32%로 가장 많고 중국 한족 29%, 베트남 18%, 필리핀 6% 등이다.
또 이주여성들은 한국 생활에서 가장 힘든 점으로 언어(22.5％), 경제문제(21.1％), 자녀문제(14.2％) 등을 꼽았다.
경제적 안정을 찾아 이역만리 타국으로 시집온 상당수 이주여성들은 배우자의 열악한 생활기반, 소통부족, 문화적 차이 등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여성가족부는 이들 농어촌 결혼이주여성들을 위해 전국적으로 171곳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이 센터에서는 한국어교육은 기본이고, 가족교육, 다문화사회 이해교육, 개인 및 가족 상담, 취업ㆍ창업지원 등 활동을 하고 있다.
농림수산식품부 농촌사회과 장현아 사무관은 "농림부는 농어촌에 정착할 여성결혼이민자들을 위해 한국어교육과 한국농촌현실에 대한 기본 교육은 물론 현지 농민들과 연계해 1대1 맞춤형 교육과 시댁 가족과의 합숙교육 등도 실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남 영광군 다문화가족지원센터 고봉주 센터장은 "이주여성들은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살면서 고향 가족들도 도우기 위해 한국을 찾는다"며 "하지만 현실은 기대와는 다르고 특히 한국 문화가 맞지 않아 많은 갈등을 겪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문제들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해결해줘야 하는 지를 고민해야 한다"며 "이주여성들이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면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운다면 어려운 농촌 현실을 개선하는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국종합=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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