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정치의 부재와 정치의 사법화

김용판 전 청장은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과 관련해 허위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증거를 은폐했다는 혐의를 전면 부인했고, 원세훈 전 국정원장 또한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한 사실이 없으며 ‘통상적인 대북 심리전’이 정치개입으로 곡해된 것이라고 강변했다.

새누리당 소속 국정조사 특위 위원들은 ‘국정원 댓글 사건’이 대선 승리에 집착했던 민주당이 국정원 전·현직 직원을 매수해 버린 정치공작이라며 두 증인을 두둔했다. 민주당 위원들이 검사라면, 새누리당 위원들은 의뢰인으로부터 선임료를 두둑이 챙긴 변호인 같았다.

떳떳하다며 목에 힘주던 이들이 증인 선서를 거부했다. 국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사람이 국회법에 명시된 증인선서를 하지 않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위증하면 처벌받겠다’는 증인 선서는 거부하면서 이미 검찰 조사로 드러난 사실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위증죄를 피해가며 자신에게 유리한 질문만 골라 답변하는 전술을 폈다. 야당 의원들의 질문에는 “모르겠다” “답변할 수 없다”며 빠져 나갔다. 선서하지 않는게 자신들에게 유리하고, 선서하면 불리하다는 얘기다. ‘사실만을 말하겠다’고 서약하면 불리하고 거부하는 게 그나마 유리하다니 ‘사실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한 거나 다름없다. 거짓을 말하고 위증하겠다는 것을 두 사람 스스로 전제한 셈이다.

정말 떳떳하고 당당하다면 선서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 ‘위증하겠다.’고 전제한 상태에서 떳떳하고 우긴다는 건 대낮에 국민들 앞에서 사기를 치겠다는 거나 진배없다. 원세훈·김용판 두 사람이 국선변호인처럼 행동한 새누리당 위원들의 비호 아래 전 국민 앞에서 ‘사실대로 말할 수 없으니 차라리 위증하겠다’고 선포한 거다.

국정원의 조직적인 대선 여론조작과 경찰의 축소, 은폐, 대선활용 수사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국정조사가 결국 파국을 맞이했다. 국정조사가?진행되고 있는데, 무슨 파국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회 국정조사에서 ‘사실만을 말하겠다’는 ‘증인 선서’를 거부한 원세훈·김용판은 국정조사를 농락했고, 새누리당도 이들 범죄자와 한통속이었음이 밝혀졌다.

가장 중요한 원세훈·김용판, 두 인물의 증인?선서 거부와 김무성, 권영세 두 사람의 증인 채택 불발은 8월 23일 채택 예정인 보고서가 아무런 의미도 성과도 없는 종이 나부랭이에 불과함을 예견하고 있다. 국정조사를 통해 진실을 알고자 했던 국민은 모욕을 당했고, 이제 국정조사를 통해서는 진실을 규명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들이 했던 행동들은 그 누가 봐도 범죄였다.

그러나 새누리당, 언론, 청와대는 범죄가 아니었다고 한통속으로 억지주장을 펼치고 있다. 범죄가 아니라고 거짓을 외치는 자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너희의 행동은 범죄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이다.

국정원 국정조사를 보면서 현대 민주주의가 국민 중 ‘가지지 못한 자’를 대표하지 않고, 부와 권력 및 기회를 독점한 자들에 봉사하는 ‘과두 정치’로 변질했다는 수없이 많은 정치, 경제, 사회, 언론, 철학학자들의 경고가 떠올랐다.

증인선서를 거부한 원세훈과 김용판이 국회를 모독함으로써 국민을 무시한 것은 논하고 싶지도 않다. 문제는 민주주의를 짓밟은 혐의를 받고 있는 그들의 증언 거부를 온갖 궤변으로 변호하는 새누리당 의원들의 행태이다.

국민을 대의 한다는 국회의원으로서 국정원의 대선 개입의 실체에 대해 정확히 알고 싶은 국민의 바람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파당적 이익에 파묻혀 변호하는 모습이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과두 정치에 확실히 들어섰음을 입증하고 있다.

자신의 정치적 존재의 근거와 권위의 본질을 부정하는 자기 모순적인 궤변들은 이들이 과연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증인선서마저 거부한 증인들을 변호하는 새누리당 의원들의 행태는 이미 대한민국의 정치체제가 과두 정치로 들어섰다며 민주주의의 조종을 울리는 행위와 같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증인선서를 거부한, 그래서 청문회에서 한 말들은 아무런 법적 효력도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에 유리한 질문에는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하면서,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하면 ‘기억나지 않는다’ ‘답변하지 않겠다’로 일관한 원판을 옹호하는 궤변을 통해 정치를 무력화시키고, 모든 결정을 사법부로 넘겼다.

정치를 포기함으로써 세비를 받아야 할 근거를 스스로 포기한 새누리당 의원들의 행태는 정치적 책임을 치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