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런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은 죽산선생의 민비석

옛날 어느 마을 처녀가 이웃마을 남정네와 눈이 맞아 결혼도 하기 전에 아기를 낳았다. 부모가 아기 아빠를 추궁하자 겁이 난 처녀는 산 중턱 암자에서 수행하는 어수룩한 공초스님을 생각해 내고 스님에게 겁간 당해 임신을 하게 됐노라고 거짓말을 했다.

처녀의 부모가 아기를 빼앗아 암자를 찾아가 “네 새끼 네가 키워라.”라며 스님에게 아기를 던지자. 스님은 “그런가?” 하면서 아이를 받았다.

그 다음날부터 공초스님은 그 아기를 안고 마을로 내려와 동냥젖을 얻어 먹이며 길렀다. 마을 사람들은 스님이 내려와 동냥을 구할 때마다 “처녀를 겁간한 파계한 중놈”이라며 돌을 던지고 욕지거리를 해대고 몽둥이찜질을 해댔지만 스님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이 광경을 본 처녀는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하다가 부모와 마을 사람들에게 진짜 아기 아빠는 스님이 아니라 이웃마을 아무개라고 고백하고 말았다.

그러자 이제까지 스님을 핍박했던 부모와 마을 사람들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줄줄이 스님의 암자로 찾아가서 용서를 빌고 아이를 달라고 하자 스님은 이번에도 “그런가?” 하며 아무 말 없이 아이를 선선히 내어줬다.

사람들이 “스님은 아기가 스님의 아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왜 우리에게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묻자 스님이 입을 열었다.

“처자의 부모가 애를 나에게 맡길 때 사실을 말하고 진위를 가리면 나와 처자와 아기가 행복할까? 그러면 부처님이 좋아하실까? 그렇다면, 나 없이 아이가 살 수 있을까? 이 세가지를 생각했소.”하고 대답했다.

이것을 불가에서는 지관행(止觀行 마음을 고요히 하여 정토의 경계를 관찰하는 것)이라 한다.

▲ » 죽산 조봉암선생의 묘

우리나라 첫 정치적 사법살인의 희생자인 죽산 조봉암 선생이 대법원 전원일치로 무죄가 확정된지도 한 달여가 돼간다.

1959년 7월31일 정적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뒤 52년 만에 억울함이 풀린 선생의 묘소가 인근 망우산에 있어 며칠 전 지역의 몇 분들과 함께 선생의 묘를 찾았다.

참배를 하고 나서 선생의 묘비를 살펴보니 비석의 뒷면은 선생의 생애에 대한 비문이 없는 민비석이었다. 듣자하니 선생의 가족들이 선생이 신원(伸?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품)될 때까지 선생의 업적에 대한 비문을 기록하지 않기로 해 지금까지 비워뒀다 한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의 고문에 손가락이 7개씩이나 잘려나가고, 농지개혁을 단행함으로 한국전쟁에서 농민봉기를 미리 차단하는 선견지명으로 대한민국을 지킨 선생이 간첩 혐의로 형장의 이슬로 살아졌다는 것은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번 대법원의 판결이 죽산에 대한 무죄 판결이 아니라 “권력에 빌붙는 사법계와 사형제도에 대한 유죄판결”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을 보면서 생각해보니 국가는 마치 사생아를 낳아 스님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웠다가 시간이 지난 뒤 진실을 말한 처자와 같을 것이고, 국민은 진실을 모른 채 스님께 돌을 던지다가 다시 용서를 비는 마을 사람들에 다름없다. 그리고 선생의 묘비를 비워둔 선생의 가족들은 공초 스님처럼 묵묵히 지관행을 수행하는 수행자들이었던 것이다.

생전에 선생은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ㆍ다만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라고 말했고 이는 선생의 묘소 안내문에 새겨져 있다.

또한, 죽음을 앞두고 선생은 “나는 평화통일의 씨앗을 뿌린 것이고 열매는 후대에 맡긴다”며 “이승만은 소수가 잘살기 위한 정치를 했고 나와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잘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다.

이제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말했다지만, 지금의 조국의 통일과 민주주의의 발전 상황은 선생의 뜻과는 거리가 멀어져 가고 있다.

▲ 죽산의 어록을 새긴 묘소 안내석

혁명이란 방법을 쓰지 않고 역사를 바로잡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단종 복위를 꾀하다 역적으로 몰렸던 사육신이 충신으로 신원되는데 200여년이 걸렸지 않은가?

승자의 기록인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사실이 진실과 동떨어져 억울하게 기록돼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실은 하나이고 언제가 밝혀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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