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자태만 허락하던 석탑이 눈앞에 다가왔다. 희부연 새벽 기운이 온 들에 퍼져있다. 아무것도 없지만 꽉 차 있는 빈 절터. 거돈사지는 그렇게 우리를 허락했다.

그날 밤, 늦은 출발 탓에 강원도 문막에 도착한 시각은 밤 11시가 넘었다. 시골길이라 가로등도 없는 길을 내비게이션에 의지해 넘었다.

손곡 이 달이 벗들과 작별하던 흥원창은 4대강 공사에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유려하던 물줄기는 보이지 않은데 공사 흔적이 훨씬 짙었다.

강은 이렇게 자꾸 망가지는구나.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하고 길을 재촉했다. 하지만 가도가도 아늑하던 시골길은 완전히 모두 공사판이다.

슬슬 짜증이 났다. 멀쩡한 길을 파헤치고 강을 헤집어 놓았다. 그런데 한참을 달리다보니 또다시 같은 길을 달리고 있다.

“어어. 이거 왜 이러지?”

내비게이션은 여전히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없이 계속 같은 길을 가리키고 있다. 깊은 산길이 나온다. 좁은 길을 겨우 겨우 운전하다보니 어, 또다시 그 길이다.

아까부터 같은 길을 계속 달리고 있다. 오늘은 절터가 우리를 허락하지 않는구나. 무엇엔가 홀린듯하다. 사람들은 하나도 없다. 하긴 밤 12시 가까워진 시간, 그리고 시골에 누가 나와 있으랴.

다시 문막 읍내에 갔다. 하지만 잠자리가 없다. 이래저래 우격다짐으로 거돈사지로 가기로 했다. 어쩔 수 없었던가. 이번에는 길을 열었다. 오랫동안 빈 절터를 지켜온 거목을 보고야 우리는 마음이 편해졌다.

차 안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희미한 석탑이 우리를 들여다본다. 빈 절터는 천년의 어둠이 내려 캄캄하다. 까무룩히 꿈속에서 천년 전, 그 스님을 봤던 것도 같다.

지금 내가 잠시 떠나 있는 우리 아이들도 만났고, 얼굴을 알 수 없는 뭇중생들을 만났다. 벌써 몇 번이던가. 집에서 가깝고 복잡한 마음을 정리할 수 있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에 적당한 장소가 여기만한 곳이 없다. 그래서 자주 여기 내려온다. 하지만 이제는 여기도 거친 손길이 닿기 시작했다.

여행에 동참한 최 선생이 조심스럽게 어둠 속을 걷는다. 그는 좋은 교사가 되려고 끊임없이 고민한다. 나는 그에게 얼마 전 일본에 나가 근무를 시작한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를 해주었다.

‘제 아들이 중학교 때 이렇게 말했어요. 훌륭한 선생님이 되려고 하지 말고, 좋은 선생님이 되려고 하라고요. 조그만 게 그렇게 절 훈계하잖아요.

훌륭한 것보다 좋은 것이 좋은 것 같아요.’이 맘 때면 많은 교사들이 자신을 살핀다. 새로운 아이들을 맞을 준비를 하게 된다.

새로운 마음가짐을 다지는 교사들이 훨씬 많다. ‘좋은 선생님’이 되려는 선생님들이 그만큼 많은 것이다. 다행이다.





새벽, 빈 절터는 어둠 대신 청명한 기운을 채운다. 차가운 기운이 볼을 아리지만 단아한 석탑은 오랜 도력(道力)으로 우리를 반겼다. 여전히 범치 못할 기세다. 천천히 경내를 돌았다. 아련히 동녘이 밝아온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절터. 그러나 어디서나 빈틈이 없다.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려놓기에는 빈 절터만한 곳이 없습니다. 오늘 새벽부터 나는 내려놓기 위해 걷습니다.’ 몸이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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