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불고기와 만둣국을 만들어 먹고 윷놀이를 하는 부모와 함께 미국 뉴저지주(州)에서 자랐고, 한국처럼 뒤늦게 민주화를 이룬 나라들이 학살과 고문 등 아픈 과거사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연구하는 저명한 학자가 됐다.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27일 개최하는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한 리 페인(Leigh Payne.53.여)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의 얘기다.
그의 고향 방문은 반세기, 정확히 말하면 49년 6개월 만이다.
페인 교수는 27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어릴 적 보모에게서 배웠던 한국어를 거의 다 잊어버렸지만, 학자가 되고 나서도 한국에 대해 자연스레 관심이 쏠렸다"며 웃었다.
페인 교수의 연구는 세계 90개국의 과거사 대처 사례를 데이터베이스(DB)로 통계 분석해 책임자 심판과 사면, 진실규명 위원회(진실위) 활동 등의 조처가 얼마나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 도움이 됐는지를 실증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가 심포지엄에서 발표하는 논문 「정의의 균형: 과거사 바로 세우기가 인권과 민주주의를 개선할 때(Justice Balance: When Transitional Justice Improves Human Rights and Democracy)」는 우루과이와 함께 한국의 과거사 정리 사례를 자세히 소개했다.
그는 "한국은 아쉬운 점도 많지만,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성공적으로 과거사를 정리한 경우에 속한다"고 평가했다.
"이후 사면이 되기는 했지만, 전직 대통령 2명(전두환, 노태우)이 내란죄로 재판을 받았잖아요. 사실 심판과 사면은 상반된 것 같지만, 법적 책임을 묻는 동시에 정치적 안정성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상호 관계가 있어요. 잘 섞어 쓰면 인권 신장과 정의 구현에 도움이 되죠."
페인 교수는 이 논문에서 재판, 사면. 진실위 운영 등 과거사 청산 수단을 균형 있게 두루 써야 현실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총체적(holistic) 접근법을 강조했다.
진실위 하나만으로는 과거사를 바로잡기 어렵고 재판과 사면 등 다른 수단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진실위의 역할을 낮게 평가할 것도 아니라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지만 과거사에 대한 논의를 활성화하는 장점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실위를 거쳐 증언하는 가해자는 대부분 '나라를 위해 한 일"이라며 사과를 거부하죠. 반면 이런 발언은 국민이 '학살이 과연 애국이었나?' 등의 질문을 던지게 해요. 과거로 회귀해선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는 "정말 무서운 것은 침묵"이라며 "예컨대 진상 규명 없이 보상만 하는 일은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돈을 주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라고 과거사를 끊임없이 되새겨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페인 교수는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90개 국가의 사례를 나라별로 세밀히 분석해 과거사 정리가 미래 세대의 인권 신장 등에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주는지 입증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한국에 대한 추가 연구도 하고 있다. 미네소타대에서 한국 진실화해위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김헌준 씨 등 동료 학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페인 교수는 "진실위가 종료된 이후에 한국의 과거사 대처 상황을 잘 살펴보고 싶다"며 "언어장벽이 큰 문제인데 어릴 적 한국어 실력이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페인 교수는 뉴욕대 대학원을 거쳐 1991년 예일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위스콘신대 등에 근무했으며, 올해 1월부터 옥스퍼드대에서 남미 지역학 전공으로 교편을 잡고 있다.
페인 교수의 아버지는 연세대에서 전기공학을 가르치고 학내 라디오 방송국을 세웠던 침례교 선교사 도널드 페인(Donald Payne)씨다.
그는 1947년 한국에 도착해 동료 선교사와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페인 교수를 낳았으며, 6ㆍ25가 터지자 일본으로 잠시 피신한 것을 제외하면 계속 한국에서 근무하다가 1960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번 방한에서 페인 교수의 '작은 소망'은 4.19 혁명 기념비를 찾아 사진을 찍는 것이다.
역시 한국에서 태어난 네 살 터울 여동생의 생년월일이 바로 혁명 기념일 당일인 1960년 4월 19일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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