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에는 큰 문제가 없는데 혹시 가정에 무슨 문제가 있나요"
10월의 마지막 날 구름 낀 하늘 아래 가을비가 쏟아졌음에도 은평구 녹번초교 본관 앞에는 오전 11시부터 긴 줄이 생겼다.
고려대 교우회가 주최하고 '여자교우회 의료봉사단'이 중심이 돼 준비한 결혼이민자와 이주노동자 대상의 의료봉사 행사에 참여하려는 주민들이 행사 3시간 전부터 몰려든 것.
이윽고 의료봉사가 시작되자 결혼이민 여성들과 이주노동자, 독거노인 수십 명이 줄서서 교실과 의료 차량을 오가며 의사와 상담했다.
가정의학과, 외과, 정형외과, 피부과, 임상병리 등의 진료 코너가 마련된 1학년 2반 교실은 시간이 갈수록 빈자리 없이 붐볐고, 엑스레이 촬영과 치과 진료용 기기를 갖춘 3대의 대형 의료 차량에도 주민들이 바삐 타고 내렸다.
필리핀에서 온 지 9년째라는 로사페비(41.여)씨는 "건강검진을 병원에서 받으려면 많이 비싼데 이렇게 무료로 해줘서 좋다. 내가 검진받으러 간다니 남편도 무척 좋아하더라"라며 봉사단의 인술에 연신 고마움을 표시했다
한국인 남편 사이에 4살 된 딸을 둔 니카라과 출신의 엘리자베스(25.여)씨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무료라 경제적 부담도 없는데 약까지 주고 다들 친절해 좋다"라며 활짝 웃었다.
일부 환자들은 의사들이 시종 환한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손길로 건강 검진과 치료를 해주자 그동안 외국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소외감을 한순간에 떨쳐버릴 수 있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봉사단이 마음의 병까지 치유해줬다는 것이다.
의료봉사단은 지난해 고려대 의대를 졸업한 여성 의사들이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에 사는 사람들한테 봉사하고자 만든 단체로 현재 12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주로 독거노인이나 쪽방 주민들 대상으로 소규모 의료봉사를 해온 이들이 결혼이민자에 눈길을 준 것은 최근 은평구에서 산부인과를 운영하는 한 동문 의사의 충격적인 경험 때문이다.
당시 환자가 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음에도 어려운 경제 형편으로 오랫동안 검진조차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동문이 결혼이민자와 이주노동자들의 건강 문제를 봉사단에 알려 공론화함으로써 이번 행사를 기획한 것이다.
이날 행사에는 봉사단 소속 여의사 20여명과 자원봉사자 등 60여명이 참여해 교우회와 구청 , 교회 등의 도움을 받아 10여개 의학 분야에서 300여명의 결혼이민자와 이주노동자, 독거노인들을 진료했다.
이향애 단장은 "의사의 본분인 진료로 한국에 들어온 사람들을 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소외된 사람들에게 의술을 베풀도록 하겠다"라며 "의사로서 돈을 버는 것보다 이렇게 의술을 베풀고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
고대 교우회는 이번 행사를 시작으로 매월 넷째 주 토요일 오후에 정례적으로 봉사활동을 벌일 계획이다.
hapyry@yna.co.kr
(끝)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편집국 webmaster@evernews.co.kr
<저작권자 © 에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윤 대통령, 총리·비서실장 인선에 깊어지는 고심…총선 수습 출발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