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아주 위험한 게임’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위기를 자초하고 있는 형국이다. 정치학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정통성(legitimacy)의 위기’와 ‘효율성(efficiency)의 위기’가 겹치면, 어떤 권위주의적인 정권도 버티지 못하고 결국 무너진다.

 효율성의 위기는 경제성장, 분배와 복지, 일자리, 주택 공급 등 국민들이 실생활에서 원하는 바를 정부가 제대로 충족시켜 주지 못할 때 온다. 한마디로 정부의 효율성이 심각하게 떨어질 때 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넉 달밖에 되지 않아 성급하게 단정할 수는 없으나 경제정책 등에서 국민의 기대 수준 이상으로 잘하고 있다는 징후를 찾기는 어렵다. 

 투개표 과정에서 의혹과 시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박근혜는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이다. 정통성이 심각하게 부정당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취임한 지 4개월이 지나면서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바로 국가 최고정보기관의 쿠데타나 다름없는 여론조작과 대선 개입에 대한 후속조치나 대처 방향과 관련,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거나 잘못된 길을 가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난 12월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국가정보원은 절대 저질러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질렀다.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여론조작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래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구속 여부와 상관없이 이건 보통 심각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뇌물 수수죄 등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바로 헌정질서를 무너뜨리는 쿠데타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기소될 때까지 국정원의 조직적인 대선 개입과 여론조작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사실상 침묵으로 일관했다.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으로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 이득을 봤거나, 대선 과정에서는 여론조작 사실을 몰랐다고 해도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언론보도에 이어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는 순간, 박근혜 대통령은 단호하고 분명한 입장을 밝혔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사실상 침묵으로 일관하는 사이, 국가정보원은 또 다른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 바로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의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한 것이다. 이건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세계 10대 교역국에 걸맞은 문명국가가 아니라 야만국가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천명한 것이나 다름없다.

 “(모든) 약속은 지켜야 한다(Pacta sunt servanda)!”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개인과 개인의 상거래는 말할 것도 없고, 국내 질서와 국가와 국가 사이의 질서와 평화도 사라진다. 다만, 어떤 조약이나 약속을 체결하고 난 뒤 그 조약의 근간이 된 본질적인 사정에 변경이 발생하면 그 조약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대화록 공개는 남북 사이에 벌어진 직접적인 계기나 갈등 때문이 아니라, 대선 개입과 여론 조작으로 궁지에 몰린 국가정보원이 순전히 자기 조직 방어 차원에서 벌인 ‘악질적인 2차 범죄’다. 깨어있는 시민들은 국가정보원이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나 허락 없이 자의적으로 일을 벌인 것이라고 믿지 않는 분위기다.  

 이제 모든 것은 과거로 돌아갔다.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가 국민은 안중에도 없이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죽을 때까지 오직 통치만 하던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다. 이제 ‘성공한 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형사 처분으로 쿠데타는 더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시민들의 믿음도 흔들리게 됐다. 학교에서 책과 씨름해야 할 고등학생들이 촛불을 들고 길거리로 나선 것이 그 반증이 아닐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다음 행보를 주시하고 있다. 박근혜의 원칙은 어떤 원칙이고, 그 원칙은 어디로 갔는지 동시에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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