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에게 정치를 돌려주어야 한다

얼마 전 한 학술모임에서 ‘조선 시대 세종대왕보다 현시대 서민이 더 부자일까?’ 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원로 한 분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지금의 서민이 더 부자다’라고 하셨다. 경제성장이 그간 얼마나 이루어졌는데 그런 소리를 하느냐는 힐난이 이어졌다.

경제성장의 마술에 혹해 세종대왕보다 현재의 서민이 더 부자라는 착각에 빠진 분들이 의외로 많다. 어느 한 시점에서 보면 한 사람의 소득증가는 다른 사람의 소득감소를 의미한다. 이를 ‘써로우’라는 학자는 증가한 것과 감소한 것을 합하면 제로가 된다 하여 ‘제로섬’이라 하였다.

한 학급에 10명의 학생이 있을 때 어느 학생이든 1등에서 10등 어딘가에 속하게 된다. 이들이 아무리 공부를 하여도 학생들 전체가 석차를 더 올릴 방법은 없다. 어느 누구가 석차가 오르면 다른 누구는 석차가 떨어진다. 이게 제로섬이다.

이 석차를 소득이라 생각해보자. 학생들의 소득을 전체적으로 올릴 방법이 있는가? 없다. 그런데도 부득불 경제는 성장한다고 고집을 피우는 집단이 경제학자들이다(나도 경제학자이지만 그런 부류와는 다르다). 그러면 그들은 다른 반과 비교해서 성적을 더 올릴 수 있다고 반격한다. 학교 전체로 보자는 말이다.

그러나 학교 전체로 확대해도 학교 석차를 전체가 올릴 방법은 없다. 그럼 또다시 열심히 공부하면 다른 학교와 비교해서 성적을 올릴 수 있지 않으냐고 반격할 것이다. 광주 전체로 보자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광주 전체로 확대해도 광주학생 전체의 석차를 동시에 올릴 방법은 없다.

그럼 또다시 광주성적을 다른 도시 성적보다 더 좋게, 한국성적을 다른 국가보다 더 좋게, 급기야는 지구 학생들의 성적을 다른 우주 학생들의 성적보다 더 좋게 해야 한다는 지경에 까지 이를 것이다. 결론적으로 지구 전체 학생들의 지구 석차를 동시에 올릴 방법은 없다. 그러니 세종대왕은 당시의 부자이고, 현재의 서민은 현재의 가난한 사람이라는 말만 진실이다.

물론 처음의 예에서 한 학급의 10명 학생이 다른 학급보다 보다 더욱 더 우수하다면 학교 전체 석차를 가지고 평가할 때 그들의 노력으로 학교석차를 올릴 수 있다. 그래서 강대국들이 자꾸만 FTA를 하자고 하는 것이다.

‘부자다’라는 말의 영어 표현인 ‘rich’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rex’인데 왕, 혹은 지배라는 뜻이다. 지배하는 자가 부자라는 말이다. 부의 분포나 지배력의 분포 모두 제로섬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능한 유일한 일은 지배 피지배의 분포에서 우리의 위치를 개선하는 것이다.

우리 국민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것이 뭘까. 돈에 과도하게 지배되어 오늘의 현실을 희생한다든지 지역발전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지역의 온갖 문화를 파괴한다든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정당정치가 지역주민을 지나치게 지배하고 억압하는 현실이 가장 심각하다.

정치는 투표행위로 표현된다. 투표는 원래 유권자들의 권력을 당선자에게 모두 양도하고 스스로 노예가 되겠다는 계약 행위다. 유권자들은 투표일 하루만 정치하고 나머지 4년, 혹은 5년 내내 노예상태에서 정치인들의 노예로 사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지역기반 정당이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는 정당이 공천하는 후보를 유권자들이 승인하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문제점도 있다.

더구나 정당은 자신의 지지기반 계급들과는 상관없이 존재한다. 영남서민은 영남지역 기반 정당에 투표하며, 호남부자들은 호남지역 기반 정당에 투표한다.

앞으로 정당구조가 어떻게 바뀌든 이 구도는 견고할 것이다. 이것을 극단적으로 단순화시켜 말하면 한국에는 지금 정당 파시즘이 횡횡하고 있다.

이런 형태로 대의제에서 표를 받는 우리의 정당은 시시때때로 당론을 통한 정치를 함으로써 지역주민의 의견을 무시하여 시민의 억압 한다. 정당의 생존이 목적이고 지역주민은 수단인 것이다.

정당 정치의 이 같은 한계 때문에 요즘 다시 정당공천제 폐지 논의가 한창이다. 유권자들의 권력을 전적으로 정당에 양도하지 않고 지역주민이 정치권력을 지속해서 보유하려면 정당공천제를 폐지해야 한다.

그럼에도 결국 정당정치를 핑계로 정당공천제를 고집하는 것은 일종의 분업체제를 작동하여 정치의 영역을 일반주민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술책이다. 정당공천제를 통해 지키려고 하는 정당정치는 지고지순의 목적일 수 없다. 지역의 주민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당당하게 표현하고 살게 하는 것이야말로 지고지순한 목적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