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니 국민이 분노하는 거다

길대통령 탄핵이나 헌법 개정만큼 열람·공가 어렵게 돼 있는 대통령기록물을 국정원과 새누리당이 일반문서 취급을 해 전문을 공개한 것은 누가 봐도 불법행위다. 이미 2008년 1월 대화록이 불법 유출돼 새누리당으로 흘러갔다는 의혹도 제기된 상태다.

김무성 의원의 발언이 단초가 됐다. 대선 당시 새누리당 선대위 총괄본부장이었던 그가 최고 중진연석회의에서 “지난 대선 때 이미 내가 대화록을 다 입수해 읽어 봤다”고 말한 게 언론에 알려진 것이다.

지난날 국정원이 내놓은 공개본의 작성 날짜는 이명박 인수위가 꾸려진 2008년 1월로 돼 있다. 누군가 사본을 만들어 MB 인수위에 갖다 준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과정에서 왜곡과 조작이 있을 수 있다는 게 문 의원의 주장이다.

문 의원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김만복 전 국정원장의 증언이 나왔다. 김 전 원장은 2008년 1월 국정원 공개본이 작성될 당시 국정원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또 다른 대화록을 만든 것은 항명죄이자 비밀누설죄에 해당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국정원에 의해) 공개된 사본은 내가 국정원장 재임 시 작성됐으나 나는 모르는 사실이다. 2007년 10월 1부만 보관하고 파기하라고 지시했다. 다른 대화록을 작성한 것은 항명죄이자 비밀누설죄에 해당한다.”
이 증언과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과 권영세 주중대사의 발언 등을 종합해 보면 선명한 그림이 그려진다.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자 인수위 측과 국정원이 밀통해 누군가 국정원장 몰래 대화록 부본을 바탕으로 ‘사본’을 만들어 MB 측에 전달했고, 이것이 새누리당으로 건너가 일부 의원들에게 회람된 게 확실해 보인다. MB정부는 국가 1급 비밀을 실정법을 위반하면서 빼돌려 유출했고, 박근혜 캠프는 이 불법문서를 대선 전략용으로 활용한 셈이다. 이러니 어찌 국민이 분노하지 않겠는가.

새누리당과 국정원의 만행을 규탄하는 촛불집회와 시국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수구언론을 총력 동원해 노 전 대통령을 ‘NLL 포기한 종북주의자’로, 민주당을 ‘종북정당’으로 몰아세우면 불법공개 논란이 사그라질 것으로 내다봤던 새누리당의 기대와는 사뭇 다른 상황이다. 수십 개의 대학 총학생회가 비난성명과 시국선언을 했고, 대학교수들은 릴레이 시국선언에 동참하고 있다.

역사학자, 헌법학자, 변호사 등 전문가 집단도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을 비난하고 나섰다. 대화록이 박근혜 캠프와 새누리당으로 흘러들어 간 것만으로도 공직선거법과 실정법 위반에 해당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NLL 대화록의 공개에 따른 불법성을 모면하고자 국정원이 내놓은 해명이 가히 기절초풍할 초법과 월법을 넘나들어도 한참은 넘나들었다. 그들의 해명으로는 대통령의 정상회담 발언에 대한 도청이 국정원 고유 업무에 속하는 것으로 확정됐다.

국정원의 해명은 최고 주권의 실체를 무력화시키는 것을 넘어서 국정원 자체가 민주주의와 헌법 위에 존재하는 무소불위의 존재임을 선언한 것과 다름이 없다.

국정원이 내놓은 해명을 기준으로 한다면 대통령지정기록물이란 아무 쓸모없는 것이 돼버렸다. 국정원이 고유의 업무인 정보수집용으로 역대 대통령의 정상회담 회의록을 도청해 작성해두었을 것이므로 이명박이 일본에 가서 독도 영유권에 대해 ‘기다려 달라’고 말한 것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어졌다.

궁금한 정상 간 대화는 국정원 고유 업무로 작성된 정보수집용 대화록을 그저 까기만 하면 된다.
권영세 주중대사가 정권이 바뀌면 회의록을 까겠다고 말한 이유를. 물론 본인은 부정했지만, 그 진실 여부를 넘어 역대 대통령은 물론 박근혜 대통령의 한미정상회담과 한중정상회담의 대화록도 국정원의 고유 업무에 따라 정보수집용으로 작성돼 있을 것이니 그것을 까는 것이야 얼마나 손쉬운 일인가.

국정원의 고유 업무 범위가 이 정도에 이르러 있다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도 국정원을 해체하는 수밖에 없다. 국가정보기관의 역할 때문에 국가의 주권이 위협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국정원이냐 아니면 민주주의냐를 결정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어느 때보다 야당인 민주당의 역할이 중요할 때다. 그런데 실망이다. 임시국회가 종료된 지난 2일 민주당 원내대표와 수석 부대표 등이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최경환 새누리당 대표와 윤상현 수석 부대표 등이 참석한 ‘폭탄주 회식자리’를 가졌단다.

사생결단을 각오하고 일전을 치러야 할 야당이다. 불법행위와 국기 문란 사태를 보며 가슴을 치는 국민을 생각해서라도 국정조사 주시하는 국민의 눈, 만을 생각할 때다. 전병헌 원내대표 측은 전의를 불태우는 대신 폭탄주 러브샷을 한 이유를 “싸우더라도 상생 화합하며 함께 가자는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뭔 소린가. 싸울 의지가 없다는 얘기로 들린다.

새누리당은 ‘역풍’이 분다 해도 ‘찻잔 속 태풍’에 불과할 것이며, 촛불집회와 시국선언도 조만간 잦아들 거라고 기대하는 모양이다. 오판이다.

국정조사가 막 시작됐다. 이 때문에 잠시 주춤한 것뿐이다. 민심은 국회를 주시하며 새누리당이 어떻게 나오는지, 민주당이 얼마나 제 역할을 하는지 지켜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