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유럽에서 흰색은 좀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여진다.
김행지 서울대미술관 선임학예사는 "유럽에서의 백색(Whiteness)은 빛을 따로 떼어놓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빛과 연계된 백색의 이미지는 곧 생명체에 에너지를 주는 것으로 인식되고 다산의 이미지와도 연계된다는 설명이다.
서울대미술관이 마련한 '백색의 봄'전은 '백색'을 주제로 한 이탈리아와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함께 소개하며 동서양의 백색 미학의 차이를 살피는 전시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돼 인도 뉴델리와 태국 방콕을 거쳐 서울을 찾은 전시로, 이탈리아 쪽에서 16명, 한국에서 12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김 학예사의 설명대로 이탈리아 작가 작품들은 대부분 빛과 연계된다. 파브리치오 코르넬리는 흰 벽에 구멍이 뚫린 평평한 놋쇠 판 몇 개를 박아넣고 아래에서 할로젠램프를 비춰 쥐와 올빼미, 토끼, 사람의 얼굴까지 구체적인 형상을 지닌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카를로 베르나르디니는 발광하는 광섬유로 공간을 꾸민다. 또 프랑코 이온다는 빛에서 별을 연상해 별을 주제로 한 작업을 선보인다.
피파 바카는 신부 복장을 하고 전쟁 지역을 히치하이킹으로 돌아다니는 사진 퍼포먼스 작업으로 생명과 연계되는 백색의 이미지를 구현한다. 특히 여행 중 만난 그 지역의 산부인과 의사의 발을 씻겨주는 퍼포먼스 사진은 전쟁으로 죽어간 장소에서 새로운 삶을 탄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작가는 '흰색'에 대해 좀 더 다양한 해석을 보여준다. 닳은 흰 비누 사진으로 시간의 흐름을 담아낸 구본창에서부터 단순히 흰색 자체에 얽매이지 않고 흰 벽에 스테인리스 선으로 관악산의 산줄기를 그린 최인수, 보는 방향에 따라 평면으로 보였다가 입체로도 보이는 김인겸의 조각 등은 한국의 백색 미학이 무채색 모노크롬 회화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김 학예사는 "한국의 백색 미학은 드러내기도 하면서 동시에 감추기도 하는 특징이 있다"라며 "한자로 표현하면 '흰 백'(白)이 아니라 '흴 소'(素)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빛을 이용한 권대훈의 작품은 이탈리아와 한국 작가의 작품을 연계하는 듯하다. 그냥 보면 금속판이 빽빽이 꽂힌 나무판은 빛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나무가 가득한 숲으로, 사람의 얼굴로 자유자재로 변형된다.
전시는 9월26일까지 계속된 뒤 일본으로 이어진다. ☎02-880-9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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